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1세(황제) (문단 편집) ==== 아스파르의 반격과 후유증 ==== 레오 1세는 원정 사령관인 바실리스쿠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지만 황후인 [[베리나]]의 간곡한 설득에 목숨을 살려주며 용서하였다. 그러나 정적이자 게르만 군부의 수장 아스파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즉각 반격하였다.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레오 1세의 둘째 딸 레온티아과 자신의 아들 [[파트리키우스]](Patricius)의 결혼을 강제로 성사시켰다. 그리고 황제의 사위가 된 아들 파트리키우스를 [[카이사르(칭호)|카이사르]]로 선포했다. 이어 아스파르와 아들들은 음모를 계속 이어 나갔다. 이에 레오 1세와 제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고 471년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궁전으로 초대해 환관들이 칼을 들고 공격하게 하여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. 이때 레오 1세의 사위이자 아스파르의 아들 중 1명인 파트리키우스는 부상만 입은 채 목숨을 건졌다. 레온티아는 대신 [[안테미우스]] 황제의 아들이자 [[마르키아누스]]의 외손자인 [[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]]와 결혼하게 되었다.[* 이 마르키아누스는 향후 아내의 언니의 남편, 즉 한국식으로 일컫자면 큰동서인 제노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.] 아스파르의 살해사건은 레오 1세의 황권을 강화시켜 주었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곳에서 불통이 튀고 말았다. 동고트의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Theodoric_Strabo|테오도리크 스트라보(Theodoric Strabo)]]가 아스파르 살해를 구실로 삼아 레오 1세에게 트라키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아스파르의 권한을 넘기고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. 이에 레오 1세는 제안을 즉각 거절하였고, 테오도리크는 트라키아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. 결국 레오 1세는 473년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는데 조건은 [[테오도리크]]가 아스파르의 옛 지위를 받고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족에게 매년 금 2천 파운드를 공납금으로 바치는 것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